민호는 사후세계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착하게 살면 극락에 가거나 부자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리고, 반대로 나쁜 마음을 먹고 악업을 쌓으면 지옥으로 가거나 하잘 것 없는 축생으로 태어나 고통스럽게 살며 몇 배로 되갚게 되리라는 그 시대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진 인과응보 원리에 입각한 단순한 세계관을 가진- 극히 평범한 피지배 계급의...
하늘이 높았다. 날이 흐리다. 구름 대신 일렁이는 오색의 휘장이 지붕을 덮었고 태양 대신 번쩍거리는 보석이 사방에서 빛을 뿌렸다. 청량한 바람 대신 진한 향수와 지분 냄새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곳은 산도 나무도 보이지 않는 깎아지른 땅이고 꽃들마저 마음대로 시들 자유조차 잃은 땅이었다.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너른 인공의 도시를 색을 ...
마녀재판은 항상 해질 무렵 중앙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서녘 하늘을 비스듬히 물들이던 노을은 피처럼 붉었다고,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저 아이는 마녀가 맞다!” “와아아아아!” “신의 이름으로 마녀를 사형에 처한다!” 심문관의 판결이 떨어지고, 힘 센 장정들이 아이를 묶어 산처럼 높이 쌓인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안 돼! 그간 동생처럼 돌보아...
“다음 주부터 중간고사다. 집에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주말 끼워서 시험일정 잡은 거니까 주말 동안 어디로 새지 말고 공부 빡세게 해. 자 반장?” “차렷, 선생님께 경례!” “감사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중간고사라니. 하루 종일 엎드려 자느라고 그것도 미처 몰랐다. 한 일주일 정도는 더 남은 줄 알았는데 놀랄 노짜였다. 태민은 공을 차려고 후다닥 짐을 ...
“야, 너 학번 떼고 나이가 몇이야? 군대는 다녀왔냐? 아 장난 아니야 진짜 니 이름 떼어 버렸다니까?” 「아니 이 쥐콩알만한 년이 나 니 선배야, 선배한테 뭐래?」 “선배고 지랄이고 니가 먼저 반말 까면서 욕했잖아. 뭐, 년? 그래 너 콩알만한 년한테 엿 더 처먹어보고 싶냐?” 「아 나 이 미친년을 봤나, 너 거기 딱 있어 존만한 줘도 안 따먹을 씨발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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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층입니다.」 무거운 카트를 끌고 5층, 인문과학서적 열람실로 들어섰다. 2단짜리 무거운 카트에는 청구기호별로 딱딱 각을 맞추어 정리해 둔 책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수많은 책들에게 제 자리를 찾아 주는 일은 눈알이 빠지도록 신경 쓰이는 정신노동이었다. 몇 푼의 장학금으로는 택도 없는 그런 고된 정신+육체노동. 그의 이름은 이태민, 중앙도서관 사서 아르바...
“설날 특가 깜짝 세일 시작합니다. 오늘의 첫 세일입니다. 한우 세트! 30프로! 30프로에 드립니다. 선착순 30명에 한해 드립니다. 자 어머니들! 밀지 마시고 줄 서세요. 여기 있는 분들 다 드릴 테니까 걱정 마시고 오세요! 횡성에서 올라온 한우 종합 선물세트 파격 세일합니다!” 설을 앞둔 대형 마트는 발 디딜 틈 없이 분주하다. 개장한 지 얼마 안 됐...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봄은 더 따스하게 무르익어갔다. 떠날 적 보았던 한양 도성의 진달래와 목련나무는 하얀 눈을 머리에 인 채 봉오리도 틔우지 못한 나목들에 불과했건만 성을 지나 등성이를 넘고 나루를 건너고 산하나 두 개를 넘어 갈수록 천지는 푸르게 물들어갔고 귓가를 스치는 바람도 솜털마냥 따스해졌다. 산허리와 봉우리 끝을 물들인 진홍의 꽃 빛을 보며 그이는...
옛날, 어느 작은 마을에 태민이라는 열두 살짜리 사내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태민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계모와 두 누님, 그리고 갓 태어난 쌍둥이 남동생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천석꾼 만석꾼인 아버지도 계셨지만 아버지는 새 장가를 들고 남동생들이 태어난 이후부터 병석에 누워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일찌감치 저승으로 떠...
귀양지의 해는 늦게 저물었다. 황성(皇城)에서부터 삼백 리 길 떨어진 머나먼 이 곳 북도(北道)는 뼈가 시리도록 추운 땅의 끝에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조반을 먹고 나면 그 뒤로는 할 일이 없어 그저 툇마루에 앉아 서럽도록 시린 하늘 한가운데를 바라보며 태평가를 부르곤 했다. 책 한 권도, 하다못해 언 땅을 일굴 쟁기도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아 정말 할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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