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황후가 되고 싶지 않으냐?” 넌지시 묻는 그의 말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진저리가 쳐지도록 농도 짙은 정사를 치르고 난 후에 내리는 질문 치고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시시하다. “왜 그리 살래살래 고개를 젓느냐?” “…….” “말해 보아라. 태민아.” “전…, 성도 없고, 가문도 없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천한 사내놈인데 어찌 황후를 생각할 수가...
초여름의 흙비는 오래도록 내리고 있었다. 정수리와 뺨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물방울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의 어깨 위에 닿자마자 옅은 김을 내뿜으며 증발하고 있다. 아침나절에 고이 차려 입었던 흰 비단으로 만든 무복(武服)은 피와 빗물에 젖어 너덜거렸다. 여름의 하루는 길어 땅거미가 다가오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아이는 휘청거리며 목검을 지팡이처럼...
싸늘한 바람과 함께 문간으로 들어선 소년은 황금용이 수놓인 화려한 외투 끝자락을 몇 번 털었다. 방 안에서 짙은 사향 냄새가 풍겼다. 붉은 색 초 수십 수백 개가 하나도 빠짐없이 눈을 뜨고 공간을 밝히는데 그 천박함과 무질서함에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소년은 버선발로 달려 나온 여인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누구였던가. 입은 의복이 화려하고 눈부신 것으로 ...
순금으로 만든 향로에 두어 자루의 향이 꽂혔다. 진홍빛 불꽃에 닿자마자 실처럼 가늘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공간을 채우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내. 세상에 온통 작약과 장미가 핀 것 같았다. 그토록 짙은 향이었다. 말로 일주일을 쉬지 않고 달려야 갈 수 있다는 머나먼 남국에서 바쳐 온 귀한 향이었다. 소녀를 여인으로 만들고, 병자를 걷게 하는 것은 물론 시든 ...
딱딱하고 차가운 돌바닥이 등을 아프게 때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지 않았던들 머리나 등뼈가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뒷걸음질을 쳐 보아도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한여름이었지만 지하 고문실의 서늘한 냉기는 언젠가 태민과 한 번 놀러가 본 북궁 끝에 있던 빙고(氷庫)의 그것만큼이나 지독했다. 숨을 몰아쉴 때마다 허연 입김이 펑펑 쏟아졌다. 좁은 밀...
묘시(卯時) 초.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새벽이다. 깨우는 이도 없건만, 그는 문득 눈을 번쩍 뜨고 깊은 잠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소년은 밤사이에 꽉 막힌 목을 잔기침으로 풀었다. 하얀 천장, 황금색 휘장이 걸쳐진 넓은 침상. 그의 기침소리를 들었는지 분주한 발걸음소리가 문 밖에서부터 울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문득 이 공간이 너무도 낯설다는 듯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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