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복소복 쌓인 하얀 눈 위로 기나 긴 검은 옷자락을 끌며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황제는 짙푸른 용포 자락을 여미고 들창을 살짝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같은 색으로 예복을 맞추어 입은 스무 명의 헌헌장부들이 열을 맞추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전부 오른쪽 허리에 옥으로 만든 패를 차고 있었다. 그곳에는 가문의 본관, 부친의 이름과 직위, 그리고 ...
수 제국의 법궁(法宮)인 정전 앞에 수백여 명의 문무 당상관과 당하관이 도열해 있었다. 각 대신들의 품석(品石)에는 태초에 현무가 세상을 향해 물기둥을 뿜어 바다를 만들었다는 수의 건국신화가 사십팔 개의 품계석에 차곡차곡 담겨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붉은 비단자락을 끌며 그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오색찬란한 보...
어린 군주의 세계는 낡아빠진 쳇바퀴처럼 느리게 돌아갔다. 수 제국 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더웠다던 16년 전 염천의 여름, 중궁전 산실청에서 태어난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궁 밖을 나와 본 적이 없었다. 늘 똑같은 얼굴의 여인들이 시중을 들었고, 똑같은 얼굴의 대신들이 편전에 머물렀다. 매년마다 올라오는 토지 개혁안이나 법령의 개정안, 수로 개...
빨갛게 달아오른 쇳덩이 위에 누운 것처럼 온 몸이 뜨거웠다. 아무리 숨을 거칠게 쉬어도 폐가 꽉 막힌 것 같아 머리가 띵했다. 몸 안을 맹렬하게 돌던 핏방울이 죽처럼 굳어지는 것 같았다. 시야는 캄캄했고 쉴 새 없이 뜨거운 눈물과 땀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죽는 것은 아닌가. 불지옥에 떨어진 듯 고통스러웠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이불을 쥐어뜯었으나 아무도 와...
#. 연서(戀書), 첫 번째. 민, 이곳은 날이 찹니다. 지금쯤 수도에는 봄이 왔겠군요. 연락이 뜸하여 혹여나 서운했다면 미안합니다. 꽃이 피고 있을 텐데 그대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나는 무사히 보헌국(報獻國)에 도착했습니다. 보헌국은 작은 국가지만 백성들의 몸가짐이 바르고 재물을 낭비하는 법 없이 소박하며 성현의 말씀을 공경하여 어느 곳이든 불화가 없습니...
그곳은 세상의 끝 같았다. 뜨거운 모래와 따가운 바람, 그리고 죽어 있는 것들만으로 가득 찬 끝없이 붉기만 한 공간은 온 세상의 다툼과 원망들을 모조리 가져다 풀어 두고도 남을 만큼 아득하고도 넓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구릉처럼 넓게 펼쳐진 무덤처럼 둥그런 모래 산만이 모험가들을 굽어볼 뿐. 그들은 마치 환상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나...
다섯 번째의 겨울이 날카로운 이를 거두고 총총히 물러났다. 봄이 눈을 뜸과 동시에 제비가 돌아와 궐의 처마에 집을 짓고 이곳저곳 어지러이 날아다니며 꽃씨를 뿌려 주었다. 그들의 날갯짓마다 꽃이 피어나 겨우내 하얗게 비어있던 가지와 외로운 땅 위를 촘촘히 채웠다. 높은 담장 너머로 얕은 푸른색의 구릉과 수양버들로 가득 찬 산이 보였다. 뒤뜰의 작은 연못에선 ...
“무엇들 하느냐! 곧 감찰 마마님께서 들어오실 텐데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 해?” 외궁 최고참 궁녀 수나(壽娜)가 시퍼렇게 눈을 빛내며, 옷을 다리고 동정을 꿰매고 천을 마름질하는 등의 일에 바쁜 궁녀들을 다그쳤다. 딱딱, 내리치는 날카로운 죽비 소리가 몹시도 귀에 거슬렸다. 하얀 눈이 이 곳 저곳에 쌓인 한겨울이었지만 뜨거운 인두를 들고 있느라 땀이 뻘뻘 ...
검붉은 피 냄새를 품은 커다란 태양이 서산으로 넘어가고 한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암흑의 밤이 성큼 찾아왔다. 눈을 감고 있는가, 뜨고 있는가. 거친 손등으로 여러 번 자신의 눈을 비벼 보았지만 별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밤이었다. 턱 끝을 옥죄어 오는 숨 막히도록 짙은 정적을 그 누구도 깨려 하지 않았다. 문득 오스스 소름이 돋아 몸을 둥그렇게 웅크...
‘이것 먹어보려느냐.’ 헉, 이것은? 온왕 전하가 알록달록한 오색 설탕이 묻은 윤기 나는 강정을 한 사발 들고 태민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먹고 입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는 황자 사저에 들어오게 된 지가 6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나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는데다 정해진 진지 외의 군것은 일절 먹지 않는 주인 나리의 식성 덕분에 과자나 사탕 ...
*단수(斷袖)의 속편 1화이므로 단수를 먼저 읽으시면 좋습니다.* “네 이놈! 거기 서지 못하겠느냐?” “도둑새끼 잡아라!” 성공이다! 푸줏간에서 돼지고기를 사던 한 늙은이를 힘껏 밀쳐내고, 그녀가 휘청거리는 틈을 타 연잎에 정성스레 겹겹이 싼 돼지고기 덩어리를 잽싸게 낚아챈 작은 소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뛰었다. 하도 기우고 기워 이제는 본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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